
1. 양효진의 마지막 홈경기, 수원이 울었다
2026년 3월 8일, 수원실내체육관. 진에어 2025~2026 V리그 여자부 정규리그 6라운드 홈경기가 열렸다. 경기 결과를 말하기 전에, 이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한국 여자배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들블로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양효진의 정규시즌 마지막 홈경기이자, 등번호 14번 영구결번식이 열린 날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날 수원실내체육관의 분위기는 단순한 배구 경기장이 아니었다. 한 시대의 끝을 함께 목격하는 공간이었다. 양효진은 V리그 남녀 통산 득점 1위(8,392점)와 블로킹 1위(1,744개)를 동시에 보유한 선수다. 17시즌 연속 올스타 선정, 정규리그 MVP 2회, 챔피언결정전 MVP 1회. 숫자만 봐도 이 선수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압도적으로 코트를 지배해왔는지 알 수 있다. V리그 역사상 영구결번을 받은 선수가 김연경에 이어 여섯 번째라는 사실도 이 자리의 무게를 말해준다.
입장 전부터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던 양효진의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본인이 인터뷰에서 "결혼식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니, 그 무대가 본인에게 얼마나 크게 느껴졌을지 짐작이 간다. 19년을 오직 현대건설 한 팀에서만 뛴 원클럽 맨의 마지막 홈무대. 내 생각엔 그 자체로 배구 팬이라면 누구나 직관을 가고 싶었을 경기였다.
경기 중에도 양효진은 팀 내 공격성공률 1위(53.85%)를 기록하며 17점을 올렸다. 나이와 체력의 한계가 있을 텐데도 끝까지 속공과 블로킹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시즌 은퇴한 김연경도 현장을 찾아 자리를 빛냈고, 경기 후 팬들은 결과와 무관하게 기립박수로 양효진을 배웅했다. 상대팀 페퍼저축은행의 시마무라 하루요가 경기 후 "양효진은 한국에서 정말 최고의 미들블로커였다. 아무리 게임을 해도 상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선수였다"고 한 발언은, 내가 보기에 이날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었다. 라이벌 팀 외국인 선수의 입에서 나온 진심 어린 헌사는 어떤 공식 멘트보다 묵직하게 와 닿았다. 경기 결과와 별개로,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날 수원실내체육관은 충분히 기억될 자격이 있다.
2. 범실 28개, 현대건설은 스스로 무너졌다
감동적인 맥락과 별개로 경기 결과는 냉정했다. 페퍼저축은행이 세트 점수 3-1(25-23, 22-25, 25-23, 27-25)로 현대건설을 꺾었다. 득점 분포만 보면 현대건설이 딱히 압도당한 경기가 아니었다. 자스티스 야우치 19점, 양효진 17점, 서지혜와 카리 가이스버거 각 12점. 수치상으로는 고른 득점원이 돌아갔다.
그런데 범실 수가 모든 걸 설명해준다. 현대건설 28개, 페퍼저축은행 16개. 무려 12개 차이다. 내가 보기에 이날 현대건설의 패배는 페퍼저축은행에 진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 경기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범실로 흐름을 내주는 패턴이 세트를 막론하고 반복됐다. 특히 4세트는 24-24 듀스까지 가는 팽팽한 접전이었음에도 결국 공격 실수로 세트가 마무리됐다. 박빙의 접전을 스스로 헌납한 셈이다.
1세트를 보면 더 뚜렷하다. 초반에는 양효진의 블로킹과 자스티스의 서브 에이스로 3-0 선제 리드를 잡았다. 분위기는 완전히 현대건설이었다. 하지만 중반 이후 범실이 쌓이면서 주도권을 넘겨줬고, 결국 1세트를 내줬다. 2세트는 서지혜의 활약으로 역전에 성공해 가져왔지만, 3세트와 4세트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세트마다 초반 리드를 잡고도 스스로 흐름을 끊어먹는 패턴, 이건 한 경기의 문제가 아니라 팀 전체의 집중력과 멘탈 관리 문제로 봐야 한다.
내 생각엔 이날의 범실 폭발이 단순한 컨디션 문제만은 아니었다. 양효진의 마지막 홈경기라는 특수한 감정적 상황과 1위 경쟁이 걸린 승점 압박,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선수들이 평소보다 더 위축됐을 가능성이 높다. 양효진 본인도 "오늘 경기에 팀에 중요한 것들이 많이 달려 있어 복합적으로 생각이 많았다"고 밝혔다. 선수 스스로도 그 무게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해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내가 보기에 V리그 정상급 프로 선수들이 분위기에 흔들려 범실을 28개나 쏟아냈다는 건 어떤 이유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 무대에서, 그 선수를 위해 더 단단하게 싸워줬어야 했다. 이날 현대건설이 양효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승리였는데, 끝내 그걸 만들어내지 못했다. 레전드의 마지막 홈경기를 승리로 장식하지 못한 아쉬움은 팀 전체가 오래 안고 가야 할 숙제다.
3. 천적 콤플렉스 1승 5패, 1위 경쟁도 흔들렸다
이날 패배로 현대건설은 이번 시즌 페퍼저축은행 상대 전적에서 1승 5패가 됐다. 페퍼저축은행이 시즌 5승 1패의 절대 우위를 확정한 것이다. 단순히 한 팀에 자주 진다는 개념을 넘어, 이건 뚜렷한 천적 관계다. 그것도 페퍼저축은행의 주포 외국인 선수 조이가 부상으로 빠진 상태에서 당한 패배라는 점이 더욱 뼈아프다.
내 생각엔 이 천적 관계가 단순한 운이나 우연한 상성 문제가 아니라는 게 핵심이다. 페퍼저축은행은 이날 시마무라 하루요(22점)와 박은서(18점) 두 선수만으로 40점을 합작했다. 현대건설이 어떤 수비 배치와 블로킹 전술을 가져오든, 페퍼저축은행은 이미 현대건설의 대응 방식을 꿰뚫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하혜진의 블로킹이 자스티스의 오픈 공격을 반복해서 차단했는데, 이건 철저한 데이터 분석 없이는 나오기 어려운 수비다. 장소연 감독의 현대건설 맞춤형 전술이 시즌 내내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승점 문제도 심각하다. 이 패배로 현대건설은 21승 13패, 승점 62에 머물렀고 1위 한국도로공사(23승 11패·승점 66)와의 격차는 4점으로 벌어졌다. 남은 일정을 고려하면 자력으로 정규리그 1위를 확정 짓기가 사실상 어려워진 상황이다. 내가 보기에 이 경기는 현대건설 입장에서 시즌 중 가장 나쁜 타이밍의 패배였다. 양효진 은퇴식이라는 감정적으로 가장 특별한 날, 승점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가장 취약한 모습으로 졌다.
그렇다고 이 경기 전체가 실패로만 기억돼야 할 이유는 없다. 양효진은 마지막 홈경기에서도 팀 내 최고 공격성공률로 끝까지 싸웠고, 팬들은 패배에도 기립박수를 보냈다. 상대방 선수가 경기 후 자발적으로 최고의 헌사를 남겼다. 이 모든 장면들이 이날을 단순한 패배 이상의 무언가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배구는 결국 결과로 말하는 스포츠다. 남은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현대건설이 페퍼저축은행 천적 콤플렉스를 어떻게 털어낼지, 그리고 양효진 없는 팀이 끝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그것이 이제 남겨진 진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