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주아 블로킹 5개, 황민경까지 살아났다
2026년 3월 6일, 대전충무체육관. 진에어 2025~2026 V리그 여자부 정규리그, IBK기업은행이 원정에서 정관장을 3-0(25-10, 25-18, 26-24)으로 완파했다. 스코어만 놓고 보면 싱거운 경기처럼 보일 수 있다. 최하위 팀을 잡은 것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 IBK기업은행 내부에서 터진 몇 가지 장면들은, 시즌 후반 봄배구 경쟁을 앞두고 팀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신호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이주아였다. 블로킹 5개. 이 숫자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배구를 꾸준히 본 사람이라면 바로 안다. 미들블로커에게 블로킹은 단순한 득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상대 공격수의 심리를 흔들고, 팀 수비 전체의 리듬을 만들어주는 핵심 플레이다. 이주아가 블로킹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날, IBK기업은행의 수비 라인 전체가 살아난다. 내가 보기에 이주아는 이번 시즌 들쭉날쭉한 경기력으로 팬들 사이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 선수다. IBK기업은행이 지난 시즌 이소영과 이주아를 영입하면서 투자 금액 대비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비판이 꾸준히 나왔는데, 이날만큼은 그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1세트부터 이주아의 블로킹은 정관장 공격의 흐름 자체를 끊어냈다. 정관장 입장에서는 외국인 에이스 자네테를 중심으로 공격을 구성해야 하는데, 이주아가 자꾸 막아서니 자네테가 공격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 공백이 팀 전체 리듬 붕괴로 이어졌고, 25-10이라는 스코어가 나왔다. 단순히 IBK기업은행이 잘한 게 아니라, 이주아의 블로킹이 만들어낸 심리적 압박이 정관장을 흔들었다고 봐야 한다.
황민경의 활약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공수 양면에 걸친 경기력이 압권이었다는 평가가 언론에서 공통적으로 나왔고, 내 생각에도 그 평가는 정확하다. 황민경이 살아야 IBK기업은행이 산다는 공식은 이번 시즌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황민경이 리시브와 공격, 그리고 서브까지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날, IBK기업은행은 상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팀이 된다. 이날이 딱 그런 경기였다. 1세트에서 서브에이스까지 꽂아넣은 황민경의 모습은 시즌 초반 기복이 심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팬들이 기대하는 황민경, 그 황민경이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빅토리아의 활약도 이날 경기의 핵심이었다. 특히 3세트 후반 팀이 세트포인트를 내준 24-25 위기 상황에서 오픈 공격을 세 번 연속 성공시키며 역전의 발판을 만든 장면은, 이날 경기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외국인 선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져줘야 팀이 이긴다는 배구의 공식을 빅토리아가 정확하게 증명했다. 내가 보기에 빅토리아는 이번 시즌 내내 꾸준한 모습을 보여온 선수인데, 정작 팀 성적이 따라주지 않아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았다. 이날만큼은 그 존재감이 제대로 빛났고, 최정민의 블로킹 마무리까지 더해져 경기는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이주아·황민경·빅토리아, 세 선수가 동시에 폭발한 날 IBK기업은행이 얼마나 무서운 팀인지를 이날 경기가 보여줬다.
2. 정관장 1세트 25-10, 이건 경기력 문제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날 정관장의 1세트는 보는 내내 불편했다. 25-10. 프로 배구 리그에서 나올 수 있는 스코어인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IBK기업은행이 잘한 것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봄배구 생존 경쟁 중인 중위권 팀을 상대로 세트 전체를 이 정도로 헌납하는 건, 단순한 컨디션 문제나 상대가 잘해서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정관장의 이 패턴은 이번 시즌 내내 반복되고 있는 구조적 문제다. 경기 초반 리시브가 흔들리면 세터가 볼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공격진이 고립된 채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흐름이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세트 내에서 되돌리는 힘이 없다. 개별 선수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팀 전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문제다. 이날 1세트가 딱 그 패턴이었다. IBK기업은행의 이주아 블로킹과 황민경 서브에이스가 연속으로 터지는 순간, 정관장은 대응책 없이 그냥 실점을 쌓아갔다.
자네테는 분명 공격력 있는 외국인 선수다. 3세트에서 자네테를 중심으로 정관장이 24-22 세트포인트까지 끌고 간 것만 봐도, 자네테 개인의 기량은 리그에서 충분히 통한다. 그런데 내 생각엔 자네테 혼자서 감당하기엔 팀의 리시브 안정성과 세터의 토스 품질이 너무 낮다. 외국인 에이스 한 명에게 공격 기회가 쏠리는 구조인데, 정작 그 공격 기회를 만들어주는 연결 과정이 매 경기 흔들린다. 이건 자네테의 문제가 아니라 팀 조직력의 문제다. 3세트에서 박혜민이 3득점, 박여름이 2득점을 올리며 선전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1·2세트를 10점, 18점으로 내준 팀이 3세트 하나를 가져간다고 해서 경기 흐름이 바뀌지는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야 한다. 정관장의 시즌 전적은 이날 기준 8승 25패다. 이건 몇 경기 결과의 문제가 아니다.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팀 구성 자체의 한계다. 내가 보기에 정관장은 이번 시즌 리빌딩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특정 선수 한두 명을 탓하는 건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리시브 라인 구성, 세터와 공격수의 호흡, 경기 중 흐름을 끊어주는 전술 변화 능력,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부족한 상태다. 그리고 그 책임은 선수가 아니라 팀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프런트와 감독이 져야 한다. 팬들 입장에서는 매 경기가 고통스러운 관전일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이 다음 시즌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면 정관장은 시즌이 끝나기 전부터 구조적인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
리베로 최효서의 리시브 불안도 시즌 내내 지적되는 문제다. 리베로는 팀 수비의 중심이고, 리베로의 리시브 품질이 세터의 토스, 나아가 공격의 완성도까지 연결된다. 내 생각엔 정관장이 이번 시즌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리베로 포지션의 안정감 부재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네테가 아무리 뛰어도, 박혜민이 아무리 분전해도 팀은 같은 패턴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3. IBK기업은행의 봄배구 생존,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다
이날 승리로 IBK기업은행은 16승 17패 승점 50점을 기록하며 GS칼텍스(승점 48점)를 밀어내고 4위로 올라섰다. 3위 흥국생명과의 승점 차는 5점. 수치상으로는 봄배구 생존 가능성이 분명히 살아 있다. 순위표만 보면 충분히 희망적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이 결과를 두고 마냥 안도하거나 흥분하기엔 이르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날 상대는 최하위 정관장, 시즌 전적 8승 25패의 팀이었다. 이 팀을 3-0으로 잡은 것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지, 봄배구 경쟁력을 증명한 게 아니다. 진짜 경쟁력 증명은 GS칼텍스, 흥국생명, 현대건설 같은 팀들과 맞붙었을 때 나온다. IBK기업은행이 최근 7시즌 동안 봄배구 무대를 밟은 건 2020-2021시즌이 단 한 번이었다는 사실은, 이 팀의 포스트시즌 생존 능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의문 부호였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이번 시즌도 그 흐름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났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이날 경기에서 분명한 긍정 신호는 있었다. 핵심은 세 선수의 동반 활약이다. 황민경이 리시브와 공격, 서브까지 안정적으로 가져가고, 이주아가 블로킹으로 상대 공격을 틀어막고, 빅토리아가 승부처에서 연속 오픈으로 역전을 만들어낸 이날의 흐름은 IBK기업은행이 가진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질 때, 이 팀은 봄배구 경쟁에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황민경의 컨디션 기복은 이번 시즌 IBK기업은행의 최대 불안 요소다. 황민경이 흔들리는 날 팀 전체의 리시브와 공격 연결이 함께 흔들린다. 이주아의 블로킹 성공률도 경기마다 차이가 크다. 내가 보기에 IBK기업은행의 가장 큰 약점은 핵심 선수들의 컨디션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황민경과 이주아가 동시에 좋은 날은 최하위 팀도 이렇게 압도하는 팀인데, 한 명이라도 흔들리면 흥국생명이나 GS칼텍스 같은 팀에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봄배구 생존을 위해서는 이 두 선수의 컨디션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하느냐가 강성형 감독에게 남은 가장 큰 숙제다.
승점 계산도 냉정하게 해야 한다. 지금 4위에 올라섰지만 3위 흥국생명과는 여전히 5점 차다. GS칼텍스와는 단 2점 차밖에 나지 않아 언제든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 내 생각엔 IBK기업은행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남은 직접 대결들이다. 특히 GS칼텍스와의 맞대결은 봄배구 티켓을 두고 사실상 결승전 성격이 될 수 있다. 이날처럼 세 선수가 동시에 살아나는 날을 그 경기에서 만들어낼 수 있느냐, 그게 IBK기업은행의 봄배구 생존을 결정할 것이다. 3월 6일 대전에서의 승리는 출발점이다.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