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한국도로공사, 흔들릴 뻔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2026년 3월 4일, 김천체육관에서 열린 V리그 여자부 정규리그 경기에서 한국도로공사가 페퍼저축은행을 세트 스코어 3-0(25-20, 30-28, 25-14)으로 완파했다. 시즌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에서 도로공사가 챔프전 직행을 사실상 확정 짓는 의미 있는 승리였다. 정규리그 잔여 경기가 3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 경기의 결과는 단순한 승점 추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날 도로공사의 경기 운영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2세트였다. 접전 끝에 30-28로 세트를 따낸 그 순간, 내가 보기에 도로공사는 이미 이 경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압박을 버텨낸 뒤 3세트에서 더 강하게 치고 나왔다. 3세트 스코어 25-14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우위를 점한 팀이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결과물이다. 2세트의 끈질긴 접전이 오히려 3세트의 압도적인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긴 접전 끝에 이긴 팀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신을 얻는다. 그 확신이 3세트 내내 코트 위에서 느껴졌다.
1세트에서도 흐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초반 12-16으로 끌려가던 도로공사가 단번에 분위기를 뒤집은 건 모마의 퀵오픈 한 방이 기폭제가 됐다. 이후 연속 5점을 올리며 역전에 성공했고, 19-19 동점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3연속 득점으로 세트를 가져갔다. 배구에서 동점 상황의 심리전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 순간마다 도로공사는 침착했다. 뒤지고 있어도 패닉하지 않고 자기 배구를 유지하는 것, 말은 쉽지만 실전에서 해내기는 쉽지 않다. 도로공사는 그걸 이날 경기에서 반복적으로 증명했다.
이 경기에서 내 눈엔 모마가 단연 MVP였다. 24점이라는 수치도 수치지만, 득점이 필요한 순간마다 정확하게 자기 역할을 해냈다는 점이 더 값지다. 모마는 이날 경기를 통해 후위 득점 1300점 돌파라는 개인 기록도 세웠다. 오랜 시간 V리그 무대를 누비며 쌓아온 기록이 단지 숫자가 아니라, 매 경기 성실하게 소화한 시간의 총합이라는 점에서 박수를 보낼 만하다. 외국인 선수가 리그에 적응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언어도 다르고, 팀 문화도 다르고, 경기 방식도 다르다. 그 속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고 1300점이라는 기록을 세운 건 단순한 신체 능력이 아니라, 프로로서의 자세와 집중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소휘도 13점을 보태며 모마와 안정적인 공격 밸런스를 유지했다. 강소휘는 이 팀에서 모마의 그늘에 가려 화제가 덜 되는 편이지만, 내가 보기에 강소휘가 자기 역할을 묵묵히 해주는 것이 도로공사 공격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 중 하나다. 모마 한쪽으로 공격이 쏠리지 않고 두 축이 함께 돌아갈 때, 상대 팀은 수비 집중을 나눠야 하고 그만큼 틈이 생긴다. 도로공사는 그 구조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줄 아는 팀이다.
이번 승리로 도로공사는 시즌 성적을 23승 10패, 승점 66으로 끌어올렸다. 2위 현대건설(21승 11패, 승점 61)과 승점 5점 차를 벌린 상황에서 정규리그 잔여 경기가 3경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챔프전 직행은 이제 시간문제다. 시즌 내내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정상을 향해 달려온 도로공사의 일관성이 결국 이 자리를 만들어냈다. 단기 폼이 아니라 긴 시즌을 통해 쌓아온 체력, 전술, 팀워크가 지금 이 순위표를 만들고 있다. 챔프전에서도 이 일관성이 유지된다면, 도로공사는 올 시즌 우승을 충분히 노려볼 자격이 있는 팀이다.
2. 페퍼, 조이의 고군분투가 더 아팠다
이날 경기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페퍼저축은행의 조이였다. 양 팀 통틀어 최다인 25점을 혼자 뽑아냈다. 팀이 0-3으로 완패하는 경기에서 25점이라는 숫자는 대단한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 숫자가 오히려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조이가 혼자 25점을 쏟아붓는 동안 팀은 함께 버텨주질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이기려고 발버둥 치는 선수의 모습은 때로 이기는 팀의 화려함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날 조이의 경기가 그랬다.
배구는 철저히 팀 스포츠다. 아무리 뛰어난 외국인 선수가 있어도, 그 선수 한 명에게 공격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구조는 언젠가 한계를 드러낸다. 페퍼는 시즌 내내 그 구조적 한계를 반복해왔다. 상대 팀 입장에서 조이 한 명만 집중 마크하면 페퍼의 공격은 사실상 반토막이 난다는 걸 V리그 각 팀의 감독과 코치들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페퍼가 이 구조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건, 전술적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팀 전체의 득점 자원 자체가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이에게 공이 쏠리는 건 어쩌면 페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구조 안에서 다른 선수들이 얼마나 조이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는지, 그 노력이 코트 위에서 보여야 한다. 이날 경기에서 그 부분이 아쉬웠다.
내 생각엔 이날 경기에서 22개라는 팀 범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도로공사의 범실이 9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13개나 더 많은 수치다. 배구에서 범실은 상대에게 공짜 점수를 헌납하는 행위다. 한 세트에 평균 7~8개에 달하는 범실이 나왔다면, 전술이고 공격력이고 논하기 이전에 기본기와 집중력의 문제부터 짚어야 한다. 경기를 지켜보면서 범실이 날 때마다 흐름이 끊기는 게 눈에 보였다. 좋은 흐름을 탈 것 같은 순간, 스스로 끊어버리는 패턴이 반복됐다. 스스로 흐름을 끊는 팀은 상대가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무너진다. 범실 22개는 결국 스스로 흐름을 끊겠다고 반복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이 부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경기 중 집중력과 정신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2세트는 특히 아쉬웠다. 30-28이라는 스코어가 보여주듯, 페퍼는 이 세트를 충분히 가져갈 수 있었다. 긴 접전 끝에 세트를 빼앗기면서 팀의 심리적 에너지도 함께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3세트 25-14는 그 결과물이었다. 이 흐름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더 안타까웠다. 2세트를 잡았다면 경기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배구는 세트 하나가 경기 전체의 흐름을 바꾸는 스포츠다. 그 기회가 있었고, 페퍼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페퍼는 현재 시즌 성적 14승 19패, 승점 41에 머물러 있다. 5위 IBK기업은행과의 격차도 좁히지 못하고 있고, 이날 패배로 8연패라는 무거운 기록도 안게 됐다. 시즌 막바지까지 반등의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팬들의 실망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더불어 모기업 태광그룹의 구단 매각설까지 수면 위로 떠오른 상황에서, 팬들 사이에서는 경기 결과를 넘어서 팀의 존속 자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선수들이 이런 외부 불안 요인을 안고 경기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 페퍼가 처한 현실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팬으로서도, 중립적인 시청자로서도, 페퍼라는 팀이 지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가 경기 내내 느껴졌다.
조이 개인에게는 이 상황이 더 힘들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잘해도 팀이 함께하지 못할 때 느끼는 무력감은 선수 본인만이 안다. 내가 보기에 조이는 이날 경기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이 승리로 이어지지 못한 건 조이의 문제가 아니다. 팀 전체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3. 총평 — 도로공사의 완승이 아니라, 페퍼 스스로 무너진 경기
이 경기의 총평을 한 줄로 압축하면 이렇다. 도로공사의 완승이라기보다, 페퍼 스스로 무너진 경기였다.
도로공사는 분명 잘 싸웠다. 2세트에서 흔들릴 뻔한 순간을 버텨냈고, 모마를 중심으로 한 공격 조직이 안정적으로 돌아갔으며, 경기 막판 체력과 집중력도 끝까지 유지했다. 시즌 내내 꾸준함을 유지해온 팀이 그 꾸준함을 이 경기에서도 증명했다. 챔프전 직행을 눈앞에 두고 있는 팀의 면모가 경기 내내 느껴졌다. 강한 팀은 이기는 법을 알고 있다. 뒤처졌을 때 패닉하지 않고, 접전에서 무너지지 않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다. 도로공사는 이 세 가지를 이날 경기에서 모두 보여줬다.
그러나 내가 이 경기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도로공사를 향한 환호보다, 페퍼를 향한 안타까움 쪽에 더 가까웠다. 조이가 혼자 25점을 뽑아내는 동안 팀은 함께하지 못했고, 22개의 범실은 경기의 흐름을 스스로 끊었다. 2세트의 30-28 패배는 단순히 세트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니라, 경기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기도 했다. 그 이후 3세트의 25-14는 어쩌면 예정된 결말처럼 느껴졌다. 흐름이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에서 페퍼가 다시 일어서기엔, 그날의 에너지가 이미 너무 많이 소진돼 있었다.
좋은 팀은 어려운 순간에 함께 버티고 함께 올라온다. 내가 보기에 지금 페퍼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전술이나 기술보다, 코트 위에서 서로를 믿고 버티는 힘이다. 22개의 범실은 집중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팀이 하나로 묶여 있지 않을 때 나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어려운 순간일수록 서로를 의지하고 버티는 팀이 강한 팀이다. 지금 페퍼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 연대감이다.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도로공사는 챔프전을 향해 나아가고, 페퍼는 또 다른 의미의 마지막 경기들을 남겨두고 있다. 구단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소문이 떠도는 가운데, 선수들은 그럼에도 매 경기 코트 위에 선다. 그 자체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배구 팬으로서, 페퍼의 남은 경기들이 단지 패배의 연장이 아니라 무언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이가 혼자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되는 경기, 팀 전체가 함께 싸우는 경기, 딱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그것이 이 시즌 페퍼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팬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