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에는 가끔 이런 팀이 등장합니다. 매 시즌 꼴찌를 반복하면서도 꾸준히 존재감을 유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리그를 뒤흔드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는 팀 말입니다. 광주 페퍼저축은행 AI 페퍼스가 바로 그런 팀입니다. 2021-22시즌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이 팀이, 2024-25시즌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탈꼴찌라는 숫자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지는 시즌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짚어봅니다.
1. 창단부터 2024-25시즌까지: 4년간의 긴 침묵과 변화의 조짐
페퍼저축은행의 창단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2021년 광주광역시를 연고로 출범한 이 팀은 V리그 남녀부를 통틀어 유일한 호남 연고 구단이라는 상징성을 안고 출발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지역 연고 실내 프로 스포츠팀이 생긴 순간이었고, 팬들의 기대도 그만큼 컸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데뷔 시즌 3승에 그치며 최하위를 기록한 팀은 이후 시즌에도 5승, 5승을 반복하며 리그 최하단에 머물렀습니다. 특히 2023-24시즌에는 단일 시즌 여자부 최다 연패 기록인 23연패라는 치욕적인 수치까지 남겼습니다. 감독 교체도 잦았습니다. 초대 감독 김형실이 10연패 끝에 자진 사임했고, 이후 이경수 감독 대행 체제를 거쳐 조 트린지 외국인 감독 체제로 전환하는 등 구단의 방향성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중간에는 주전 리베로 오지영이 후배 선수 괴롭힘 사건으로 팀을 떠나는 악재까지 겹쳤습니다. 솔직히 그 시절 페퍼저축은행을 보면서 뭔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보다 또 비슷한 시즌이 반복되겠구나 하는 체념이 앞섰던 것이 사실입니다.
반전의 시작은 2024년 3월에 찾아왔습니다. 구단이 오랫동안 SBS Sports에서 해설 위원으로 활약했던 장소연을 제4대 감독으로 선임한 것입니다. 코치 경력조차 거의 없는 초보 지도자의 선임이라 배구 팬들 사이에서는 반응이 갈렸습니다. 실제로 현장 경험이 부족한 감독이 만성적인 하위권 팀을 어떻게 이끌 수 있을지 걱정하는 시선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구단은 그 선택을 밀어붙였고, 장소연 감독은 취임과 동시에 이용희 수석 코치를 영입해 실전 경험의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팀 구성에 나섰습니다.
2024-25시즌 개막전에서 한국도로공사를 3-0으로 완파하며 창단 후 처음으로 원정 셧아웃 승리를 거뒀을 때, 뭔가 달라졌다는 신호가 느껴졌습니다. 단순한 운이 아니라 팀의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박정아와 이한비의 투톱이 각각 14득점과 12득점으로 팀을 이끈 그 경기는 페퍼저축은행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장면이었습니다.
2. 2024-25시즌의 성과와 굴곡: 최다승 신기록과 또 한 번의 최하위
2024-25시즌 페퍼저축은행의 여정은 단순한 성장 스토리가 아니었습니다. 기쁨과 절망이 교차하는, 진짜 드라마에 가까운 시즌이었습니다. 개막전 승리로 시작했지만 이후 외국인 선수 교체와 적응 문제가 맞물리면서 7연패에 빠졌습니다. 또 시작이구나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2라운드 후반부터 팀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박정아가 에이스다운 집중력을 회복하고 이한비가 날개 공격에서 제 역할을 해내면서 3연승을 달성하며 5위로 올라섰습니다. 이 연승 과정에서 페퍼저축은행은 상대 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목적타 서브와 세터 이원정의 고른 공격 배분을 통해 단순히 한 선수에게 의존하지 않는 팀 배구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정상급 전력을 갖춘 현대건설을 5세트 접전 끝에 꺾으며 창단 이래 단일 시즌 최다승 기록인 6승을 세웠습니다. 3라운드 6경기에서 박정아가 정확히 100득점을 기록하는 등 팀 전체가 맞물려 돌아가는 감각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후반기는 다시 시련이었습니다. 외국인 선수의 기복, 세터와 공격수 간 호흡 문제, 체력 저하가 겹치며 연패가 이어졌습니다. 박정아와 이한비에게 공격이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팀 전체의 전개가 단조로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장소연 감독 역시 초보 지도자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면들이 간간이 포착됐고, 작전 운영이나 선수 교체 타이밍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시즌 최종 순위는 승점 35점으로 7위, 또 한 번의 최하위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즌이 이전과 다르다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창단 후 최다승, 최다승점, 창단 첫 3연승이라는 기록들이 쌓였고, 무엇보다 어떤 팀도 쉽게 볼 수 없는 끈질긴 팀 색깔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17연패, 23연패를 당하던 팀과 같은 팀이라고 보기 어려운 면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장소연 감독 본인도 시즌 후 인터뷰에서 달라진 점들을 인정하면서 다음 시즌에는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3. 2025-26시즌: 마침내 써 내려간 반전의 첫 줄
2024-25시즌 최하위로 마친 팀이 불과 한 시즌 만에 리그 전체를 뒤흔들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25-26시즌이 시작되자 V리그 순위표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지난 시즌까지 4년 연속 최하위였던 페퍼저축은행이 창단 최초로 리그 선두에 올랐고, 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번에는 진짜 다를 것 같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라운드에서 단일 라운드 최다승, 연속 셧아웃 승리, 홈경기 전승이라는 기록이 쌓였습니다. 아시아쿼터로 영입한 일본의 미들 블로커 시마무라 하루요가 빠른 이동공격과 블로킹으로 중앙을 장악하며 팀에 새로운 무기를 제공했고, 외국인 선수 조이 웨더링턴과의 조합이 맞아떨어지면서 공격 다양성이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이정철 SBS스포츠 해설위원이 시마무라 효과라고 표현할 만큼, 이 선수의 존재는 팀 전체의 전술 구성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시즌 도중 5라운드에서 정관장을 풀세트 끝에 제압하며 시즌 13승을 기록, 마침내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탈꼴찌를 공식적으로 확정지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굴곡도 있었습니다. 조이의 부상, 9연패 수렁, 벤치 기강 논란까지 겹치며 팀이 다시 흔들리는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한 달 넘게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시간은 페퍼저축은행의 오래된 약점인 심리적 안정감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이전과 달랐던 점은 그 연패 이후에도 팀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막판 스퍼트를 통해 창단 최다승과 최다승점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시즌을 마무리했고, 그것이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페퍼저축은행을 지켜봐 온 팬들이라면 모두 알 것입니다.
남겨진 과제도 여전히 분명합니다. 장소연 감독의 전술 운영이 더 정교해져야 하고, 세터의 안정감이 확보되어야 하며, 박정아 한 명에 대한 의존도를 분산시키는 구조가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패 상황에서도 정신력이 흔들리지 않는 팀 문화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제들을 인지하면서도, 지금 이 팀의 방향은 분명히 앞을 향하고 있습니다. 4년간 꼴찌를 반복하던 팀이 창단 첫 탈꼴찌를 이루기까지의 이야기는, 한국 여자 배구 역사에서 꽤 오랫동안 기억될 서사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