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가을이 되면 배구 팬들이 TV나 스마트폰 앞에 모여 하나의 행사를 기다립니다. 바로 KOVO 신인선수 드래프트입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세계 무대를 누볐던 선수가, 혹은 아직 교복을 채 벗지도 않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프로팀의 부름을 받는 그 순간은 늘 특별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고교 출신 유망주들이 드래프트 상위 지명을 받는 일이 잦아지면서, 팬들의 관심은 '고졸 돌풍'이라는 이름 아래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교 배구에서 프로 무대로 올라선 주목할 만한 신인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한국 배구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역사를 새로 쓴 고졸 1순위, 김관우의 등장
배구 팬이라면 2024년 10월 21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서울 강서구 메이필드호텔에서 열린 2024~2025 시즌 KOVO 남자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천안고 3학년 세터 김관우가 전체 1순위로 대한항공의 지명을 받았습니다. 남자 프로배구 드래프트 역사상 고등학생이 전체 1순위를 차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드래프트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저는 고등학생이 1순위를 받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부에서 고졸 선수가 상위 라운드에서 지명받는 일 자체가 워낙 드물었으니까요.
키 195.6cm의 장신 세터인 김관우는 단순히 체격 조건만 뛰어난 선수가 아닙니다. 2023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FIVB U-19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을 30년 만에 3위로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세계 무대에서도 통하는 세터라는 것을 이미 증명한 셈입니다.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한선수, 유광우라는 역대급 세터 듀오가 건재하지만 두 선수 모두 한국 나이로 마흔이 된 만큼,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심어야 했습니다. 그 씨앗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김관우였습니다.
대한항공이 이번 드래프트를 위해 움직인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트레이드를 통해 1라운드 지명권을 여러 장 확보했고, 아주 낮은 확률을 뚫고 전체 1순위 지명권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김관우를 품기 위해 조직적으로 준비한 대한항공의 행보는 이 선수가 단순한 유망주가 아닌, 팀의 미래 그 자체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같은 드래프트에서 한국전력이 3순위로 지명한 수성고 출신 아웃사이드 히터 윤하준도 고졸 선수였습니다. 두 선수가 나란히 상위 지명을 받으면서, 이 드래프트는 명실상부한 '고졸의 해'로 기록되었습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이 두 선수가 2025~2026 시즌 프로 무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해 고졸 돌풍이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증명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막상 실전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을 보며 많은 팬들이 고졸 신인에 대한 시선을 바꾸게 됐습니다.
2. 유럽을 거쳐 국내로: 이우진과 새로운 성장 경로의 탄생
2025년 드래프트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탈리아 프로배구 무대를 직접 경험하고 국내 V리그에 입성한 선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삼성화재가 전체 2순위로 지명한 아웃사이드 히터 이우진의 이야기입니다. 경북체육고 재학 중이던 2023년 11월, 이우진은 이탈리아 1부 리그 팀인 베로발리 몬차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한국 고교 배구 선수가 유럽 무대에 직행한 것은 이우진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배구계는 물론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도 꽤 화제가 됐습니다.
이우진이 유럽행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U-19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베스트 7에 선정되며 세계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고, 그 활약이 이탈리아 구단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195.9cm의 신장과 강력한 스파이크, 그리고 안정적인 리시브 능력을 겸비한 선수라는 평가는 국내에만 머무르기 아까운 재능이었습니다.
물론 유럽 생활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우진 스스로도 드래프트 이후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리그에서 경기에 충분히 뛰지 못해 답답했다는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젊은 나이에 홀로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경험 자체가 이우진에게는 자산이 되었습니다. 유럽 배구의 전술적 사고방식,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과 훈련하며 얻은 감각, 그리고 2년 연속 성인 대표팀에 차출돼 네이션스컵 무대를 밟은 경험은 일반적인 국내 신인이 갖추기 어려운 특별한 이력입니다.
이우진의 등장은 한국 배구 선수들의 성장 경로가 다양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을 거쳐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전통적인 경로와 달리, 해외 리그를 직접 경험한 뒤 V리그에 입성하는 루트가 새롭게 열린 것입니다. 이우진이 이 길을 개척했고, 앞으로 후배 선수들이 이 경로를 참고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배구계의 지형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3. 고졸 신인의 미래, 그리고 한국 배구가 나아갈 방향
김관우, 윤하준, 이우진의 이름들이 V리그에 등장하면서 팬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기대감이 자라났습니다. '고졸 돌풍이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흐름은 2025년 드래프트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제천산업고 출신의 아웃사이드 히터 방강호가 전체 1순위로 한국전력에 지명되며 또 한 명의 고교 스타가 프로 무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키 198.4cm에 화끈한 공격력과 안정적인 리시브 능력을 겸비한 방강호는 U-19 세계선수권에서 한국의 8강 진출을 이끈 주포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고졸 선수들에 대한 구단의 투자 방식이 점점 체계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고졸 선수를 지명하더라도 충분한 육성 계획 없이 선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다릅니다. 대한항공이 김관우를 데려오기 위해 오랜 기간 지명권을 수집하고 준비한 것처럼, 구단들이 고졸 선수를 장기 프로젝트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해졌습니다. 당장의 전력보다는 3~5년 후의 팀 구성을 내다보며 젊은 재능에 투자하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졸 선수가 프로 무대에서 빠르게 자리 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체력적인 준비가 성인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경우가 많고, 경기의 속도와 강도 차이는 고교 무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렇기에 구단의 인내심 있는 육성이 필수입니다. 재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능이 무르익을 시간과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구단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고졸 유망주들이 보여주는 잠재력은 한국 배구의 미래를 낙관하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국제 청소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일부는 해외 무대에까지 진출하며 일찍부터 세계적 수준의 경험을 쌓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프로 무대에서 몇 년의 성장 기간을 거쳐 주전 자리를 꿰찰 때, 한국 남자 배구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드래프트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이름 모를 고등학생이 리그의 판도를 바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 그것이 바로 배구 팬으로서 요즘 신인 드래프트를 더욱 즐겁게 보게 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