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순간을 경험해봤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선수가 코트 위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 장면 앞에서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 2025년, 한국 배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김연경이 마침내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37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V리그 득점 상위권을 유지하며 전성기에 버금가는 기량을 뽐내던 그가 스스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결단의 배경과 의미, 그리고 '배구 여제' 김연경이 한국 배구에 심어놓은 씨앗들을 돌아보려 합니다.
1.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유: 은퇴 선언의 배경
솔직히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 당혹스러웠습니다. 37세라는 나이가 아직 '현역 한계'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2024~2025 V리그 시즌 당시 김연경은 여전히 국내 선수 득점 1위, 공격 성공률 2위, 퀵오픈 1위 등 각종 지표에서 상위권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GS칼텍스와의 홈경기에서 19점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끈 직후 수훈선수 인터뷰 자리에서 담담하게 은퇴 선언을 했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겠다는 오랜 소신을 지킨 것입니다.
은퇴 결심의 이유는 복합적이었습니다. 관절 통증과 크고 작은 부상이 누적된 몸 상태를 냉철하게 인지하면서도, 여전히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유지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점에서 프로 선수로서의 자존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지금이 마무리할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했고, 언제 은퇴해도 아쉬움이 남겠지만 선수로서 남은 에너지를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데 쓰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결국 그의 은퇴 결단에는 미련보다 준비가 더 강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국생명 구단도 이 결정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김연경이 항상 박수칠 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왔다는 것을 구단 관계자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시즌 흥국생명은 2위 정관장보다 승점 14점 앞선 압도적 1위를 질주하고 있었으며, 결국 시즌 마지막에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김연경의 선수 생활에 가장 빛나는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 은퇴 선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은 그가 미리 팬들에게 알린 이유였습니다. 팬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고 싶었고, 그동안 김연경의 배구를 직접 보지 못했던 이들도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경기장을 찾게 될 것이라는 배려에서였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팬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이 선택이 우승이나 MVP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2. 한국 여자 배구를 바꾼 20년의 여정
김연경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여자 배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정이 아닙니다. 1990년대 화려했던 시절을 뒤로 한 채 침체기에 들어섰던 한국 여자 배구를 다시 인기 스포츠로 일으켜 세운 장본인으로 배구계 안팎에서 두루 인정받는 선수가 바로 김연경입니다.
2005년 프로에 데뷔한 이후 그는 10년 넘게 국내 정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동양인으로서 이례적으로 유럽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2012년부터는 자타공인 세계적인 배구 선수로 올라섰습니다. 터키 에자즈바시, 중국 상하이, 일본 이타쿠라 등 세계 각지의 클럽을 거치며 쌓은 경력은 국내 배구 팬들에게도 일종의 자긍심이 되었습니다. 한국 선수가 세계 최고 무대에서 당당하게 주전으로 활약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이정표였습니다.
대중적 인지도가 폭발한 계기는 2016년 리우 올림픽이었습니다. 한일전에서 보여준 뛰어난 실력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 코트 위에서의 승부욕과 시원시원한 세리머니가 국내 대중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며, 그녀뿐만 아니라 국내 배구 전체의 인지도와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경기 이후 V리그 관중 수와 TV 시청률이 눈에 띄게 상승했고, 배구를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농구 선수 박지수가 국제 대회 성적이 인기몰이에 중요하다는 점을 언급하며 배구 인기를 부러워했던 일화는 꽤 유명합니다. 그만큼 김연경의 존재는 단순히 배구라는 종목을 넘어 한국 여자 스포츠 전반의 대중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로는 도쿄 2020 올림픽 이후 공식적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으며,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미뤄졌던 공식 은퇴식은 2024년 6월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16년간 국가대표 등번호 10번을 달고 뛴 시간의 무게가 그날 경기장을 가득 채운 팬들의 함성 속에 녹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선수로서 지켜온 자존심을 끝까지 이어갔습니다.
3. 코트 밖에서도 계속되는 이야기: 은퇴 이후의 행보와 남겨진 과제
은퇴 이후 김연경의 행보를 보면서 그가 단순히 '은퇴한 선수'로 조용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흥국생명의 어드바이저로 임명되어 사무국 업무를 맡는 한편, MBC 예능 프로그램 '신인감독 김연경'을 통해 '필승 원더독스'라는 신생 배구단을 창단하고 초대 감독으로 나서는 지도자로서의 첫 도전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예능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가 흥미롭습니다. 프로 무대에서 방출된 선수, 프로 진출을 꿈꾸는 실업팀 선수, 은퇴 후 다시 코트를 밟으려는 선수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한 팀을 이루는 구성으로, 배구 생태계의 변방에 있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무대를 마련해주는 시도입니다. 단순한 연예 활동이 아니라 배구 확장을 위한 실질적인 실험에 가깝습니다. 방송 시청률이 자체 최고 기록인 2.6%를 기록하고 분당 최고 시청률은 5.6%까지 치솟는 등 초기부터 인기몰이를 이어간 것도 그 가능성을 방증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김연경은 V리그 제8구단 창단에 대한 희망도 밝혔습니다. KOVO 총재를 만난 자리에서 직접 8구단 창단에 대한 뜻을 전달했고, 이와 관련해 전북 전주시가 2027년 체육관 완공에 맞춰 여자 배구단 창단 후보 종목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현역 시절에는 코트에서 배구 인기를 이끌었다면, 이제는 구조적으로 리그를 키우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것입니다. 더 많은 선수들이 뛸 수 있는 환경, 더 많은 팬들이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그가 출범시킨 KYK Foundation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국가대표 은퇴 이벤트와 함께 공식 출범한 이 재단은 배구와 사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목표로 합니다. 한국 스포츠계에서 현역 은퇴 이후에도 이렇게 다층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한국 배구는 지금 분명 과도기에 있습니다. 김연경이라는 거대한 구심점이 사라진 자리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 차세대 에이스들이 그 무게를 어떻게 나눠 짊어질 것인지가 리그 전체의 숙제입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빈자리만이 아닙니다. 배구를 사랑하는 수십만 팬들의 열정, 세계 무대를 향한 선수들의 도전 의식, 그리고 스포츠가 한 사회에 줄 수 있는 감동의 크기를 증명한 20년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김연경의 라스트 댄스는 끝났지만, 그 춤이 남긴 파장은 한국 배구 안에서 오랫동안 울려 퍼질 것입니다.